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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난드로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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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난드로스 1세는 기원전 2세기 아프가니스탄에서 북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린 인도-그리스 왕이다. 그는 에우티데모스 1세와 데메트리오스 1세의 왕통에 속하며, 탁월한 군사적 능력과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번성한 제국을 건설했다. 펀자브 지방의 샤칼라를 수도로 삼았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 북인도에 이르는 영토를 다스렸다. 그의 출생지는 알렉산드리아로 알려져 있으며, 19가지 학문과 기술을 습득하여 동서양의 문화를 융합했다. 메난드로스는 불교를 받아들여 '밀린다왕문경'에 등장하며, 사후에는 그의 유골을 두고 도시들이 다툴 정도로 존경받았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를 이상적인 왕으로 칭송했으며, 그의 동전은 널리 유통되어 제국의 번영을 보여준다. 메난드로스는 중앙아시아에서 불교 확산에 기여했으며, 그의 통치 이후 많은 인도-그리스 왕들이 불교 상징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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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난드로스 1세
기본 정보
메난드로스 1세의 주화에 새겨진 초상
메난드로스 1세 소테르의 주화에 새겨진 초상
이름메난드로스 1세
칭호마하라자
칭호 (그리스어)바실레우스
별칭 (의미)메난드로스 구세주
통치
통치 기간기원전 165/155년–기원전 130년
선대 군주안티마코스 2세
후대 군주스트라톤 1세 (아가토클레이아가 섭정)
가족
배우자아가토클레이아
자녀스트라톤 1세
출생과 사망
출생기원전 180년경
출생지칼리시 (현재 바그람, 아프가니스탄) 또는 사가라 (현재 시알코트, 파키스탄)
사망기원전 130년 (50세)
사망지사가라 (현재의 시알코트)
매장지인도-그리스 왕국 전역의 불탑
종교
종교 (초기)그리스 다신교 (기원전 150년경까지)
종교 (후기)그리스-불교 (기원전 150년경부터)

2. 생애

메난드로스 1세는 에우티데모스 1세와 데메트리오스 1세의 왕통에 속하는 분가 출신으로 추정된다.[33][34]

나가세나와의 문답에서 메난드로스 1세는 자신의 출생지를 "알라산다"라고 답했는데, 이는 알렉산드리아를 의미한다. 여러 "알렉산드리아" 중 어느 곳이 메난드로스의 출생지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35] 프랑스의 동양학자 알프레드 푸셰는 힌두쿠시 산맥 남쪽 기슭의 카피시를 메난드로스의 출생지로 추측했다.[35]

밀린다왕문경』에 따르면 메난드로스는 19가지 학문과 기술을 습득하여 그리스와 인도 양쪽 세계의 교양을 갖추고 있었으며,[36] 나가세나와의 대화에서 통역이 없었다는 점으로 보아 인도의 언어에도 능통했을 것으로 보인다.[37]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그 뒤를 이어 즉위한 것으로 추정된다.[38][39]

메난드로스는 자무나 강과 갠지스 강 유역 동쪽으로 진출하여 사케타(아요디야)와 파탈리푸트라(파트나)를 점령했다. 그러나 동맹 관계에 있던 인도 제왕들 사이의 대립으로 인해 갠지스 유역을 포기해야 했다.[40]

메난드로스 1세는 펀자브 지방의 샤칼라(사가라)를 수도로 정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북인도에 이르는 영토를 통치했다.[41] 샤칼라의 위치는 파키스탄 펀자브 주의 시알코트로 비정하는 설이 유력하나,[35][41][42] 셰이크 푸라, 탁실라로 보는 설도 있다.[42] 라호르 서쪽 90km에 위치한 상갈라는 발음이 비슷하고 많은 유적이 존재하여 샤칼라라는 의견도 있다.[35]

만년에 메난드로스가 양위하고 출가했다는 전설이 있지만, 로마 제정 시대의 플루타르코스는 메난드로스가 진중에서 사망했다고 기록했다.[43] 사후에 여러 도시가 메난드로스의 유골을 두고 다투었고, 도시 대표자들의 협의 끝에 유골은 각 도시에 분배되었다.[44] 메난드로스는 인도를 지배한 그리스인 군주 중 유일하게 인도 측 문헌에 이름이 기록된 인물이며,[33][45] 플루타르코스는 저서 『도덕론』에서 그를 이상적인 왕으로 꼽았다.[40]

메난드로스의 자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아르테미도루스가 그의 자손으로 추측되기도 한다.[44]

2. 1. 출생과 배경

메난드로스 1세는 그리스인 가족[7]에서 태어났다. 카프사의 알렉산드리아(오늘날 바그램, 아프가니스탄) 인근의 칼라시라는 마을[8]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사갈라(현대 파키스탄 펀자브의 시알코트) 근처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9] 그의 영토는 박트리아(오늘날 발흐 주)를 포함하며, 카이베르 파크툰크와, 대(大) 펀자브 지역의 현대 인도까지 확장되었다. 그의 수도는 북부 펀자브의 번영한 도시인 사가라 (현대 파키스탄시알코트로 추정)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레코-박트리아 양식의 메난드로스 1세의 아틱 테트라드라크마(알렉산드리아-카피사 조폐창).
''앞면:'' 메난드로스가 창을 던지는 모습.
''뒷면:'' 아테나가 벼락을 들고 있는 모습. 그리스어 문구: ("구세주 메난드로스 왕").


메난드로스 1세의 은 드라크마 (기원전 155-130년).
''앞면:'' 그리스 문자 문구: ("구세주 메난드로스 왕").
''뒷면:'' 카로스티 문자 문구: MAHARAJASA TRATARASA MENAMDRASA ("구세주 메난드로스 왕"). 아테나가 벼락과 방패를 들고 오른쪽으로 진군하고 있음. 탁실라 조폐창 표시.


메난드로스 1세의 은 드라크마, 기원전 160-145년경.
''앞면'': ('구세주 메난드로스 왕'), 메난드로스의 영웅적인 흉상, 뒤에서 바라본 모습, 머리를 왼쪽으로 돌림.
''뒷면'': 아테나가 오른쪽에 서서 벼락을 휘두르고 아이기스를 들고 있으며, 카로스티 문구가 주변에 있고, 왼쪽에 문자가 있음. 참조: Sear 7604.


메난드로스의 은화
그리스어 문구: ("구세주 메난드로스 왕"). 대영 박물관.


나가세나와의 문답에서 메난드로스 1세는 자신의 출생지가 "알라산다"라고 답했다. 알라산다는 "알렉산드리아"를 의미하는데, 여러 "알렉산드리아" 중 어느 곳이 메난드로스의 출생지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35] 프랑스의 동양학자 알프레드 푸셰는 힌두쿠시 산맥 남쪽 기슭의 카피시를 메난드로스의 출생지로 추측했다.[35]

『밀린다왕문경』에 따르면 메난드로스는 19가지 종류의 학문과 기술을 습득하여 그리스와 인도 양쪽 세계의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36] 또한, 나가세나와의 대화에서 통역이 있었다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메난드로스는 인도의 언어에도 능통했을 것으로 여겨진다.[37]

메난드로스 1세는 펀자브 지방의 샤칼라(사가라)를 도읍으로 정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북인도에 이르는 영토를 다스렸다.[41] 샤칼라의 위치에 대해서는 파키스탄 펀자브 주의 시알코트로 비정하는 설이 유력하나,[35][41][42] 셰이크 푸라, 탁실라로 보는 설도 있다.[42] 라호르 서쪽 90km에 위치한 도시로, 발음이 비슷하고 많은 유적이 있는 상갈라가 샤칼라라는 의견도 있다.[35]

2. 2. 즉위와 통치

메난드로스 1세는 그리스인 가족[7]에게서 태어났으며, 카프사의 알렉산드리아(오늘날 바그램, 아프가니스탄) 인근의 칼라시라는 마을[8]에서 태어났다. 다른 자료에서는 사갈라(현대 파키스탄 펀자브의 시알코트) 근처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9] 그의 영토는 박트리아(오늘날 발흐 주)를 포함하며, 카이베르 파크툰크와, 대(大) 펀자브 지역의 현대 인도까지 확장되었다.

그의 수도는 북부 펀자브의 번영한 도시인 사가라 (현대 파키스탄시알코트로 추정)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인도-그리스 군대는 마투라, 판찰라, 사케타, 그리고 잠재적으로 파탈리푸트라까지 원정했다. 기원전 150년경의 현자 파탄잘리는 메난드로스가 마투라까지 원정했다고 묘사했다. 칼링가의 왕 카라벨라가 새긴 하티굼파 비문 또한 야바나스, 즉 인도-그리스인들을 마투라에 위치시키고 있다. 카라벨라는 사기가 떨어진 야바나 군대가 마투라로 후퇴하도록 강요했다고 말한다. 메난드로스는 숭가의 수도 파탈리푸트라까지 원정하여 충돌했을 수도 있다.

서쪽에서 메난드로스는 그레코-박트리아의 찬탈자 에우크라티데스 왕조의 침략을 격퇴하고 그들을 파로파미사다이까지 밀어내면서 인도 아대륙 북서부 지역에서 인도-그리스 왕들의 통치를 공고히 한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동전 발견은 그의 제국의 번영과 범위를 증명한다. 그의 동전 발견은 모든 인도-그리스 왕들 중에서 가장 많고 가장 널리 퍼져 있다. 그의 통치 정확한 연대와 그의 기원은 여전히 파악하기 어렵다. 역사가들 사이에서 메난드로스는 그레코-박트리아 왕 데메트리우스 1세의 조카 또는 전 장군이었을 것으로 추측했지만, 두 왕 사이에는 적어도 30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펀자브에서 메난드로스의 선임자는 아폴로도투스 1세였다.

메난드로스의 제국은 기원후 10년경 마지막 그리스 왕 스트라토 2세가 사라질 때까지 조각난 형태로 존속했다.

화폐학자 조 크리브에 따르면, 메난드로스의 왕국이 시알코트까지 뻗어 있었다는 설명은 믿기 어려운데, 탁실라 동쪽에는 그의 화폐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더 믿기 어려운 것은 인도 문헌을 토대로 역사학자들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동쪽으로 뻗어 있다는 것인데, 이는 쿠샨을 언급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메난드로스의 많은 동전 (및 헬레니즘 도자기 조각)이 시알코트 근처에서 발견된 시란왈리 호드에 있었고, 메난드로스의 더 많은 동전이 오늘날 하리아나의 소니파트 호드에 있었다. 갠지스 평원으로의 인도-그리스 원정에 대한 언급에 대한 추가적인 증거는 마투라에서 발견된 야바나라자 비문과 우타르 프라데시 서부에서 발견된 메난드로스의 동전, 야무나 강 근처에서 발굴된 파크푸라 동전 호드, 하미르푸르 구, 우타르 프라데시, 그리고 바이샬리 구, 비하르에서 이전 왕들(디오도투스 1세, 디오도투스 2세, 에우티데무스 1세)의 동전이 가득 찬 점토 항아리를 발굴한 것이다.

메난드로스 2세의 동전. 그리스어 문구: , "정의로운 왕 메난드로스".


메난드로스 1세(왼쪽)와 메난드로스 2세(오른쪽)의 초상화 비교.


"정의로운"이라는 별칭인 "디카이오스"를 가진 메난드로스라는 왕이 기원전 100년 이후 펀자브 지역을 통치했다. A. 커닝햄과 W. W. 턴과 같은 초기 학자들은 메난드로스가 한 명 뿐이라고 믿었고, 이 왕이 별칭을 바꿨거나 서부 영토에서 추방되었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보페아라치와 R.C. 시니어와 같은 현대 화폐학자들은 동전 발견, 스타일 및 모노그램의 차이점을 통해 두 명의 별개의 통치자가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 메난드로스는 첫 번째 메난드로스의 후손일 수 있으며, 그의 불교 상징은 그의 조상의 개종을 암시하는 수단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메난드로스 1세는 불교 수레바퀴가 있는 희귀한 청동 시리즈를 주조했다.

메난드로스 1세는 에우티데모스 1세, 데메트리오스 1세의 왕통에 속하는 한 분가의 출신으로 여겨진다.[33][34]

나가세나와의 문답에서 메난드로스 1세는 "알라산다"가 자신의 출생지라고 답했다. 알라산다는 "알렉산드리아"를 의미하며, 각지에 존재하는 "알렉산드리아" 중 어느 곳이 메난드로스의 출생지인지에 대해 의견이 갈리고 있다.[35] 프랑스의 동양학자 알프레드 푸셰는 힌두쿠시 산맥 남쪽 기슭의 카피시를 메난드로스의 출생지로 추측했다.[35]

『밀린다왕문경』에서는 메난드로스가 19가지 종류의 학문과 기술을 습득했다고 언급되어, 그리스 세계와 인도 세계 양쪽의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고 전해진다.[36] 또한, 나가세나와의 대화에서 통역의 존재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메난드로스는 인도의 언어에도 능통했을 것으로 여겨진다.[37] 아버지가 사망한 후, 아마도 메난드로스는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38][39] 메난드로스는 자무나 강, 갠지스 강 유역 동쪽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여 사케타(아요디야), 파탈리푸트라(파트나)를 획득했다. 그러나 동맹자인 인도 제왕들 사이에서 발생한 대립으로 인해 갠지스 유역을 포기해야 했다.[40]

메난드로스 1세는 펀자브 지방의 샤칼라(사가라)를 도읍으로 정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북인도에 이르는 영토를 다스렸다.[41] 샤칼라의 위치에 대해서는 파키스탄 펀자브 주의 시알코트를 비정하는 설이 유력하다.[35][41][42] 샤칼라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설도 있어, 셰이크 푸라, 탁실라로 보는 설도 있다.[42] 라호르 서쪽 90km에 위치한 도시로, 발음이 비슷하고 많은 유적이 존재하는 상갈라가 샤칼라라는 의견도 존재한다.[35]

만년에 메난드로스가 양위하고 출가했다는 전설이 전해지지만, 로마 제정 시대의 플루타르코스는 메난드로스가 진중에서 사망했다고 기록했다.[43]

2. 3. 불교와의 관계

밀린다 왕이 질문을 하는 모습




전설에 따르면 메난드로스는 ''밀린다 빤하''에 묘사된 대로 불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밀린다 빤하''는 밀린다 왕과 불교 현자 나가세나 사이의 토론을 다룬 고전 팔리어 불교 경전이다. 메난드로스는 500명의 정예 그리스("요나") 병사로 구성된 경호원과 함께 다니는 것으로 묘사되며, 그의 조언자 중 두 명은 데메트리우스와 안티오코스였다.

''밀린다 빤하''에서 메난드로스는 다음과 같이 소개된다.[18]

나가세나와의 토론 이후, 메난드로스는 불교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불교 전통은 전한다.[18]

메난드로스는 그 후 왕국을 아들에게 넘겨주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18]



그러나 메난드로스가 실제로 아들을 위해 왕위를 포기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그의 통치는 성공적이었지만, 그의 죽음 이후 "느슨하게 묶인" 제국은 다양한 크기와 안정성을 가진 여러 인도-그리스 계승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메난드로스의 불교 아라한으로서의 유산은 그리스-로마 세계까지 이르렀고, 플루타르코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19]

이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20]

바르후트 야바나. 그리스 왕의 흩날리는 머리띠를 한 인물, 헬레니즘식 주름이 잡힌 북부 튜닉, 검에 불교의 삼보 상징이 새겨진 인도의 부조. 바르후트, 기원전 2세기. 인도 박물관, 캘커타.

  • 기원전 2세기, 동부 마디아프라데시의 바르후트에 있는 불교 에서 발견된 부조인 바르후트 야바나는 그리스인의 곱슬머리와 그리스 왕의 흩날리는 머리띠를 한 외국인 병사를 묘사한다. 이는 메난드로스를 묘사한 것일 수 있다. 그는 오른손에 아이비 잎을 들고 있는데, 이는 디오니소스의 상징이다. 또한, 기하학적인 주름이 여러 줄로 잡힌 옷의 일부는 전형적인 헬레니즘 양식이다. 그의 검에는 트리라타나의 불교 상징인 삼보가 나타난다.
  • 바자우르에서 발견된 불교 유물함인 신코트 케이스킷에는 "마하라자 미나드라"(“위대한 왕 메난드로스”) 통치 기간의 특정 해의 "카르티카 달의 14일"을 언급하는 헌정 비문이 새겨져 있다.[21]
  • 고대 스리랑카 자료인 마하밤사에 따르면, 그리스 승려들은 메난드로스 시대에 불교의 적극적인 전도자들이었다. 요나 (그리스)의 마하다르마라크시타(Mahadharmaraksitasa)는 오늘날의 카불 근처에 있는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도시인 "알라스산드라"(알렉산드리아 카우카소스로 추정)에서 30,000명의 승려와 함께 기원전 2세기경 스리랑카아누라다푸라에 있는 마하 투파 ("대") 건립 행사에 참석했다고 한다.[22]


메난드로스 1세 치세에 확장된 부트카라 탑


메난드로스 1세의 동전이 부트카라 탑의 두 번째로 오래된 지층(GSt 2)에서 발견되어 메난드로스 치세 동안 추가적인 건설이 있었음을 시사한다.[23] 메난드로스는 마우리아 제국 시대에 처음 건설된 후 부트카라 탑의 두 번째로 오래된 층을 건설한 인물로 여겨진다.[24]

이러한 요소들은 북서부 인도에 있는 그리스 공동체 내에서 불교의 중요성과 메난드로스의 후원 아래 그리스 불교 승려들이 수행했던 두드러진 역할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나가세나와의 문답에서 메난드로스 1세는 자신의 출생지가 "알라산다"라고 답했다. 알라산다는 "알렉산드리아"를 의미하며, 여러 곳에 존재하는 "알렉산드리아" 중 어느 곳이 메난드로스의 출생지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35] 프랑스의 동양학자 알프레드 푸셰는 힌두쿠시 산맥 남쪽 기슭의 카피시를 메난드로스의 출생지로 추측했다.[35]

『밀린다왕문경』에서는 메난드로스가 19가지 종류의 학문과 기술을 습득했다고 언급되어, 그리스 세계와 인도 세계 양쪽의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고 전해진다.[36] 또한, 나가세나와의 대화에서 통역이 있었다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메난드로스는 인도의 언어에도 능통했을 것으로 여겨진다.[37]

메난드로스 1세가 주조한 동전은 종류와 수량이 모두 많았으며, 다른 인도 그리스 군주가 발행한 동전보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유통되었다.[41][40] 메난드로스의 동전에는 불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법륜이 새겨져 있지만, 인도에서는 불교 이외의 종교도 법륜을 사용한 예가 있어, 동전의 법륜만으로 메난드로스가 불교 신자였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47]

2. 4. 죽음과 유산

''앞면:'' 메난드로스가 창을 던지는 모습.
''뒷면:'' 아테나가 벼락을 들고 있는 모습. 그리스어 문구: , "구세주 메난드로스 왕".]]

MAHARAJASA TRATASARA DHARMIKASA STRATASA


메난드로스 1세는 만년에 양위하고 출가했다는 전설이 전해지지만, 로마 제정 시대의 플루타르코스는 메난드로스가 진중에서 사망했다고 기록했다.[43] 플루타르코스는 메난드로스를 자애로운 통치의 예시로 들며, 그의 신하 도시들이 그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다투었고, 결국 그의 유해를 나누어 각자 "기념물"(스투파)에 안치했다는 점을 설명하는데, 이는 부처의 장례식을 연상시킨다.[25]

사후에 많은 도시가 메난드로스의 유골을 놓고 다투었기 때문에, 도시 대표자들의 협의 끝에 유골은 각 도시에 분배되었다.[44] 인도를 지배한 그리스인 군주 중에서 유일하게 인도 측 문헌에 이름이 기록된 인물이며,[33][45] 플루타르코스는 저서 『도덕론』에서 메난드로스를 이상적인 왕으로 꼽았다.[40]

메난드로스의 자손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 없지만, 아르테미도루스는 그의 자손으로 추측되고 있다.[44] 그의 제국은 기원후 10년경 마지막 그리스 왕 스트라토 2세가 사라질 때까지 조각난 형태로 존속했다. 그의 많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메난드로스의 말년은 조일로스 1세와의 또 다른 내전으로 점철되었을 수 있다. 《밀린다 팡하》는 메난드로스의 지위가 불안정했음을 보여주는데, 그 이유는 그가 수많은 적들에게 둘러싸여 좁은 영토에 갇힌 듯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견해는 메난드로스의 뒤를 그의 아내 아가토클레이아가 이어받았으며, 아가토클레이아는 어린 아들 스트라토 1세가 성인이 되어 왕위를 계승할 때까지 섭정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반면, R.C. 시니어와 데이비드 비바를 비롯한 다른 화폐학자들은 스트라토 1세가 메난드로스 사후 수십 년 동안 통치했다고 주장한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메난드로스는 그의 아들 트라손이 잠시 뒤를 이었으며, 그의 단일 동전이 알려져 있다.

3. 메난드로스 1세의 동전

메난드로스 1세는 다른 인도-그리스 왕들보다 더 많은 종류와 수량의 동전을 주조했으며, 이 동전들은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유통되었다.[41][40] 그는 금화, 은화, 동화 3종류의 동전을 22가지 종류로 주조 및 유통했으며, 동전에는 청년기부터 노년기까지의 메난드로스 초상화가 새겨져 있었다.[46]

메난드로스 1세의 동전에는 불교의 상징인 법륜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불교 이외의 종교에서도 법륜을 사용한 예가 있어, 동전의 법륜만으로 메난드로스가 불교 신자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47]

메난드로스의 은화, 뒷면에 아테나. 대영 박물관


메난드로스 동전은 동쪽으로는 마투라, 서쪽으로는 카불, 남쪽으로는 구자라트, 북쪽으로는 카슈미르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심지어 남웨일스의 도시 유적에서는 로마 주조 동전과 함께 메난드로스 동전이 발견되기도 했다.[46][48] 메난드로스 사후에도 그의 동전은 오랫동안 사용되었으며, 그가 사망한 지 200년 후에도 구자라트 지방의 바루가자에서 그의 동전이 통용되었다는 기록(Periplus of the Erythraean Sea|에리트라 해 안내기|영어)이 남아있다.[49]

화폐학자 조 크리브에 따르면, 메난드로스 왕국이 시알코트까지 뻗어 있었다는 설명은 탁실라 동쪽에는 그의 화폐 증거가 없기 때문에 믿기 어렵다고 한다.

파키스탄의 바자우르에서는, 메난드로스 시대에 주조된 화폐와 함께 그의 이름이 새겨진 사리 용기가 출토되었다.[35] 발견된 사리 용기를 메난드로스의 불교 신앙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지만,[47] 메난드로스 자신이 불교를 신봉했던 것이 아니라 사리 용기가 메난드로스의 치세에 봉납되었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라는 견해도 있다.[35]

메난드로스는 자신의 동전에 아테나 알키데모스("백성의 구원자 아테나")의 표현을 도입한 최초의 인도-그리스 통치자였으며, 이는 아마도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펠라에 있는 아테나 알키데모스의 유사한 조각상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이 유형은 이후 대부분의 후기 인도-그리스 왕들이 사용했다.

Bopearachchi에 따르면, 그의 은화는 앞면에 아테나를, 뒷면에 아테나의 속성인 부엉이를 묘사한 희귀한 드라크마 시리즈로 시작한다. 이 시리즈의 무게와 모노그램은 이전 왕 안티마쿠스 2세의 것과 일치하며, 메난드로스가 안티마쿠스 2세의 뒤를 이었음을 나타낸다.

다음 시리즈에서 메난드로스는 인도 통치자들 사이에서는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관습인 자신의 초상을 도입했다. 뒷면에는 그의 왕조의 상징인, 번개를 던지는 이른바 아테나 알키데모스가 등장하는데, 이는 메난드로스의 많은 후계자들이 사용했으며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들의 상징이기도 했다.

메난드로스는 문구를 동전과 같이 오른쪽으로 정렬하도록 변경했다. 이 수정은 동전을 회전하지 않고도 읽을 수 있도록 했으며, 이후 모든 인도-그리스 왕들이 예외 없이 사용했다.

메난드로스는 또한 단일 언어 비문이 있는 매우 희귀한 아티카 표준 주화를 주조했는데, 이는 박트리아(여기에서 발견되었음)에서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박트리아 왕에 대한 그의 승리를 과시하고 메난드로스 자신의 왕국에 대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메난드로스의 청동화에는 올림픽, 인도 및 기타 상징의 다양한 변형이 있다. 메난드로스가 청동에 대한 새로운 무게 표준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4. 평가

초기 학자들은 메난드로스가 한 명뿐이라고 믿었으나, 현대 화폐학자들은 동전 발견, 스타일 및 모노그램의 차이점을 통해 두 명의 별개 통치자가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 메난드로스 2세는 첫 번째 메난드로스 1세의 후손일 수 있으며, 그의 불교 상징은 조상의 개종을 암시하는 수단이었을 수 있다.

4. 1. 긍정적 평가

플루타르코스는 메난드로스를 자애로운 통치의 모범으로 꼽았으며, 그의 신하 도시들이 그의 장례를 서로 치르려고 다투었고, 결국 그의 유해를 나누어 각자 "기념물"(스투파)에 안치했다는 점을 설명하는데, 이는 부처의 장례식을 연상시킨다.[25]

5. 현대의 유산

메난드로스 1세의 동전은 영국에서도 발견될 정도로 널리 퍼져 있어, 그의 제국이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12] 그의 동전은 인도-그리스 왕들 중에서 가장 많고 널리 퍼져 있다.[13]

1-2세기경의 ''에리트라해 항해기''는 메난드로스의 통치와 인도에서 인도-그리스의 영향력을 증언한다.

기원전 2세기 마디아프라데시의 바르후트에 있는 불교 에서 발견된 부조인 바르후트 야바나는 그리스인의 곱슬머리와 그리스 왕의 흩날리는 머리띠를 한 외국인 병사를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메난드로스를 묘사한 것일 수도 있다. 그의 검에는 불교의 삼보 상징이 나타난다.

메난드로스 1세의 동전이 부트카라 탑의 두 번째로 오래된 지층에서 발견되어 메난드로스 치세 동안 추가적인 건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23]

"정의로운"이라는 별칭을 가진 메난드로스 2세라는 왕이 기원전 100년 이후 펀자브 지역을 통치했다. 현대 화폐학자들은 동전 발견, 스타일 및 모노그램의 차이점을 통해 두 명의 별개의 통치자가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 메난드로스는 첫 번째 메난드로스의 후손일 수 있으며, 그의 불교 상징은 그의 조상의 개종을 암시하는 수단이었을 수 있다.

''비타르카 무드라'' 제스처는 인도-그리스 주화에 새겨져 있다. 위: 운명의 여신 튀케와 제우스. 아래: 인도-그리스 왕 니키아스와 메난드로스 2세의 묘사.


메난드로스 1세의 통치 이후 여러 인도-그리스 통치자들은 자신이나 그리스 신들을 오른손으로 불교 비타르카 무드라와 동일한 상징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코끼리와 함께 있는 메난드로스 주화.


메난드로스의 불교 개종은 그의 뒤를 이은 왕들의 절반에 가까운 주화에 불교 상징주의를 어떤 형태로든 사용하게 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산치의 스투파 I 북쪽 문에 있는 외국인. 사타바하나 시대, 기원전 2세기 또는 1세기.


메난드로스 통치 기간 또는 직후에 제작된 산치의 프리즈는 그리스 복장을 한 불교 신봉자들을 묘사한다.

최초로 알려진 붓다의 표현 중 하나인 간다라.


프톨레마이오스 세계 지도의 아시아 세부 묘사. "Menander Mons"는 지도 중앙, 인도 아대륙의 동쪽, 말레이 반도 바로 위에 위치해 있다.


붓다의 의인화된 표현은 인도-그리스 주화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인도-그리스 왕들이 붓다를 묘사하는 데 있어 인도적인 비상징적 규칙을 존중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인도 마하라슈트라 주 아우랑가바드시에 있는 밀린드 대학교는 메난드로스 1세의 이름을 팔리어로 번역한 "밀린드"에서 이름을 따왔다.

고대에는 "메난드로스 산맥"이 인도 아대륙의 극동에 있는 산맥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으며, 이는 1세기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프톨레마이오스 세계 지도에 나타나 있다.[28]

6. 각주


참조

[1] 백과사전 Menander https://www.britanni[...]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012-09-08
[2] 서적 Historical Routes Through Gandhara (Pakistan): 200 B.C-200 A.D https://books.google[...] National College of Arts 2006
[3] 저널 Three Seasons of Excavations at Pir Manakrai, Haripur: Preliminary Report http://ojs.uop.edu.p[...] 2015
[4] 문서 Bopearachchi (1998) and (1991), respectively. The first date is estimated by Osmund [[Bopearachchi]] and R. C. Senior, the other Boperachchi
[5] 웹사이트 Menander {{!}} Indo-Greek king https://www.britanni[...] 2021-09-06
[6] 서적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0
[7] 서적 Western Civilization: Beyond Boundaries https://books.google[...] Cengage Learning 2013
[8] 서적 Who's Who in the Greek World Routledge
[9] 서적 Dictionary of World Biography, Volume 1 Taylor & Francis
[10] 서적 Geographica Teubner
[11] 웹사이트 Full text, Schoff's 1912 translation http://www.fordham.e[...]
[12] 서적 The Graeco bactrians and Indo Greeks world Taylor & Francis 2020
[13] 서적 Lost World of the Golden King: In Search of Ancient Afghanista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4] 저널 Coins of Alexander's Successors https://books.google[...]
[15] 서적 The Age of Imperial Unity Bharatiya Vidya Bhavan
[16] 저널 The Most Southern Hoard of Bactrian Coins in India https://books.google[...] 1904-09
[17] 저널 Beyond the Tigris https://books.google[...] Koninklijke Brill 2002
[18] 문서 The coins of the Greek and Scythic kings of Bactria and India in the British Museum, p.50 and Pl. XII-7 https://archive.org/[...]
[19] 서적 A framework for Gandharan chronology based on relic inscriptions, in "Problems of Chronology in Gandharan Art" http://www.archaeopr[...] Archaeopress 2017
[20] 웹사이트 Halkias (2014: 94) https://www.academia[...]
[21] 문서 harvnb|Bopearachchi|1991|page=19}}, quoting the analysis of N.G. Majumdar, D.C. Sicar, S.Konow
[22] 웹사이트 Text http://lakdiva.org/m[...]
[23] 웹사이트 Handbuch der Orientalistik, Kurt A. Behrendt, BRILL, 2004, p.49 sig https://books.google[...]
[24] 문서 "King Menander, who built the penultimate layer of the Butkara stupa in the first century BCE, was an Indo-Greek."in ''Empires of the Indus: The Story of a River'', [[Alice Albinia]], 2012
[25] 문서 A passage in the "Mahā-parinibbâna sutta" of the "[[Dighanikaya]]" relates the dispute of Indian kings over the ashes of the Buddha, which they finally shared between themselves and enshrined in a series of stupas.
[26] 서적 Moralia: Praecepta gerendae reipublicae Teubner
[27] 문서 "A guide to Sanchi" John Marshall. These "Greek-looking foreigners" are also described in Susan Huntington, "The art of ancient India", p. 100
[28] 서적 Boot, Hooves and Wheels: And the Social Dynamics behind South Asian Warfare, Saikat K Bose, Vij Books India Pvt Ltd, 2015 https://books.google[...]
[29] 문서 O. Bopearachchi, "Monnaies gréco-bactriennes et indo-grecques, Catalogue raisonné", Bibliothèque Nationale, Paris, 1991, p.453
[30] 웹사이트 History of Early Stone Sculpture at Mathura: Ca. 150 BCE - 100 CE https://books.google[...] BRILL 2019-04-02
[31] 문서 『ミリンダ王の問い』1(中村、早島訳)、349,357-358頁
[32] 문서 『ミリンダ王の問い』1(中村、早島訳)、368-369頁
[33] 문서 『ミリンダ王の問い』1(中村、早島訳)、349頁
[34] 문서 森、浪花『ミリンダ王』、17頁
[35] 문서 定方「外来民族王朝の興亡」『南アジア史』1、131-132頁
[36] 서적 ミリンダ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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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간행물 メナンドロ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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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논문 1998,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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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서적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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